향교와 서원


향교

연혁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 나라 전통 교육의 중추를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 바로 향교이다. 향교는 오늘날의 국립 중등 교육기관에 해당하는 곳으로 향학(鄕學) 으로도 불렸다. 향(鄕)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교는 지방의 학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지방교육이 최초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래되고 난 이후의 일이며, 구체적으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각 지역에 설립한 경당에서 비롯된다. 경당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함께 궁술(弓術)도 가르쳐 문무(文武)를 겸비한 교육을 하였다.

백제와 신라에도 유학이 흥성하여 백제에서는 오경박사(五經博士)제도를 두었고 신라는 태학(太學)을 설치하였지만 지방에 학교가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고구려에 비해 영토가 좁고 인구가 많지 않았던 당시 백제와 신라의 여건상 중앙 이외의 지방에 별도로 교육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데에 기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지방교육은 이전에 비하여 더욱 확대된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완비된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탄압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兩難)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이 극히 피폐해졌으며, 여기에 정치적인 실정(失政)이 거듭됨으로써 국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져 갔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 후반기로 접어들며 기능이 약화된 향교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이 각지에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는 전국에 걸쳐 400여개소에 달하였다.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대부분 설립된 서원은 부분적으로 향교의 기능을 보완하고 향촌(鄕村) 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등 많은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격화되기 시작한 당쟁(黨爭)과 연결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말기인 대원군(大院君)때에 이르러 마침내 서원 철폐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강력한 서원 철폐 정책은 서원이 당쟁의 근거지가 되어왔던 폐단을 없애기는 하였지만, 향교와 더불어 서원이 지방에서 유교교육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커다란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서원의 쇠퇴에 뒤이어 근대로 접어들며 향교 역시 커다란 시련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국내외적인 급격한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조선왕조는 외세(外勢)의 노골적인 침략을 당하게 되어 국운(國運)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유교교육뿐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갈 인재의 양성, 풍속(風俗)의 교화(敎化) 등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에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과 향교는 일제(日帝)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무력(武力)으로 한국을 합병(合倂)한 일제는 우리의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抹殺)하기 위하여 합병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지방 향교 역시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강압정책(强壓政策)에 따라 성균관은 국립대학으로서 면모(面貌)를 잃고 경전을 교육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轉落)하였으며, 향교 역시 문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이 허용되었다. 이처럼 성균관과 향교의 기능이 박탈됨에 따라 유교 역시 크게 침체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향교

해방에 뒤이은 국토의 분단, 그리고 다시 한차례 밀어닥친 6·25사변의 혼란과 시련 속에서도 유교의 조직과 체계를 다시금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은 성균관과 각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꾸준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234개의 향교는 이미 체제정비가 완료된 상태이며, 유교와 지역사회 교화의 본부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특히 1980년대 들어오면서 향교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져 전국 각 향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인성교육 현장교실' 및 각 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예절교육' 등을 개설하는 등 사회교화(社會敎化)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다.

양천향교 여름
양천향교 겨울
 

향교의 기능

기록에 의하면 향교의 설치는 고려 태조(太祖) 13년(930년)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6부생(六部生)을 가르치고 문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이어 성종(成宗) 6년(987년)에는 전국 12목(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배치하였으며, 주군(州郡)에 학사(學舍)를 세워 지방교육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후 인종(仁宗) 5년(1127년)에는 각 주(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6년(1314년)에는 이곡(李穀)을 모든 주(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가 각 지방에 널리 설치되고 유교교육의 진작과 지방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향교의 본격적인 발달과 체제의 완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이에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고려말에 수입되어 조선왕조의 창업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유교는 국가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명실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보다도 뒤늦게 전래된 불교가 대중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유교는 통치 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양상이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상황 속에서 고려 말 안유(安裕) 등의 학자에 의해 수입된 성리학은 유교의 활성화와 대중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유교 부흥을 위한 두 가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하나는 불교에 대한 배척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유교의 대중화였다. 이는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조선왕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유교의 대중화를 위한 교육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태조(太祖)는 즉위 원년(1392년)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태조 7년(1398년)에는 한양에 성균관을 건립하고 더불어 성균관과 병행할 지방교육기구로서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현(州縣)의 실정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다. 태조의 교육정책을 이어받은 태종(太宗)은 향교의 수학(修學) 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삼고 13년(1413년)에 각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학전(學田)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고루 1개소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모두 360개로 늘어나 명실공히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그 체제와 규모 및 기능을 완비하게 되었다.

학당

학당의 역사

학당이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중앙의 각 부(部)에 두었던 관립교육기관으로 동부학당·서부학당·중부학당·남부학당·북부학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원종 2년(1261)에 설립된 동서학당(東西學堂)이 그 시초이며 한말에는 신교육기관이 설립됨에 사부학당을 본떠 신교육기관의 명칭을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梨花學堂)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 등 오부학당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복원하는 것은 성균관을 중심한 교육기능을 완전히 복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의 모든 제도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었으나, 오부학당의 제도는 중국에도 없었던 것을 고려 말 유학진흥의 현실적 요청에 따라 설치한 주체적 교육 제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성균관에서는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학당 복원사업

추진목적
  1.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과거 한양의 도성은 오늘날 서울시 25개구로 재편되었고 그 지역범위 역시 넓어졌기에 그 교육 기능 역시 성균관을 중심한 5부학당 편재를 복원하고 서울시 전 지역에 확대·발전시키고자 함. 향후 각 시도별로 확대 개편할 예정
  2.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자살률1위를 비롯하여 각종 비리, 범죄, 학교폭력 등 산적한 윤리·도덕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심각한 과제로 직면하였으며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인성교육이 절실
  3. 인간존중의 가치, 효 사상, 예절교육 등 오랜 역사를 통해 전 국민 도덕·인성교육을 담당해온 성균관의 유교적 정신가치와 노하우를 오부학당을 통해 전파하고, 이를 확대·편성하여 전국민 인성교육과 유교문화 교육 진흥에 기여
  4.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의 가치를 토대로 인간존중의 문화확산을 통해 인간다움의 가치를 확인하고 사람다운 사회를 구현. 향후 청년 일자리창출에도 기여
중장기 계획
  1. 기본 계획안을 바탕으로 연차평가를 통해 교육프로그램 등을 수정·보완하고, 향후 5년간 도덕윤리의식 고취를 위한 인성교육 확산
  2. 학당을 통해 실시한 인성교육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생활화될 수 있도록 교육효과 극대화

서원

서원의 역사

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지방교육을 담당해 왔던 교육기관이다. 향교가 국립 교육기관이었던 데에 비해 서원은 사학(私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특히 조선 중기 이후 교육기관으로뿐 아니라 유교적 학술연구의 구심점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우리 나라에 있어 사설교육기관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문종(文宗) 7년(1053년)에 당시의 유교학자 최충(崔冲)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점차 그 제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를 9개의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기 때문에 최충이 설립한 사학에는 '9재(九齋)'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 9재에서는 많은 문과급제자가 배출되었으며, 이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스승인 최충의 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렸다. 고려 말엽에는 이 9재 이외에도 사립 교육기관이 11개가 더 생겼으며, 이들을 모두 합하여 '12공도(十二公徒)'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 말 성리학의 전래와 이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창업이 이어지면서 사학은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국립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의 교육진흥정책에 있었다. 조선왕조는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하여 유교 부흥을 위한 교육체제를 전면적으로 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개경에 자리잡고 있던 성균관이 서울로 옮겨져 국립 최고학부로서의 명실상부한 권위와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조선 초기 역대 임금들의 강력한 지방교육 진흥책에 힘입어 행정단위별로 전국에 걸쳐 300여개의 향교가 설치되는 등 관학 중심의 교육 체제를 완비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관학중심체제 하에서의 유교교육의 진흥은 15세기 중반까지는 비교적 안정된 형태로 지속되어 갔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관학은 점차 쇠미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관학이 부진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성균관과 향교가 유교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나 출세를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교교육과 학문연구의 주축을 담당해야 할 관학이 단지 개인의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들의 교육을 맡고 있는 교관들의 질적 저하 현상도 심각한 양상으 나타났다. 이러한 관학의 부진현상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으로 세조(世祖)의 집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종(端宗)을 폐위(廢位)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집현전(集賢殿)을 폐지하고 불교를 궁궐 깊숙이 끌어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중시하는 유교의 많은 학자들이 관계에서 물러나 초야(草野)에 묻히고자 하였으며, 무예(武藝)를 중시한 세조의 정책에 따라 학교에 대한 관심도 점차 퇴색해 갔다.

소수서원의 설경 이미지
소수서원의 설경

관학의 부진현상은 16세기에 이르러 극한적 상황에까지 도달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연산군(燕山君)은 특히 유교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는 유생(儒生)들이 한결같이 경서를 인용하여 자신의 실정(失政)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하여, 경서를 불사르고 성균관을 연회장으로 만들었으며 학자들의 독서조차 금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 시기를 전후하여 무려 네 차례에 걸쳐 꼬리를 물고 발생하였던 사화(士禍)로 많은 수의 유교학자들이 탄압을 받아 죽거나 유배를 떠나게 되었으며,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은 학자라 할지라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에 따라 관학의 침체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학의 침체가 곧 유교교육 전체의 침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의 혼란을 피하여 낙향한 많은 유교학자들이 벼슬길에 발을 끊고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주변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는 등 지방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유교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은 16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서원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바야흐로 유교교육은 관학중심체제에서 사학중심체제로 그 흐름이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 최초의 서원이 설립된 것은 조선조 중종(中宗) 37년(1542년)의 일이다. 당시 풍기 군수를 지내던 주세붕(周世鵬)은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유(安裕)를 추모하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옛 집터 위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인근의 청소년들에게 유교를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바로 우리 나라 서원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원이라는 명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 단계에서의 서원은 교육기관과 함께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교화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명실상부한 서원으로는 볼 수 없다.

백운동서원이 설립되고 5년이 지난 뒤인 명종(明宗) 3년(1547년)에 대유학자(大儒學者)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자 즉시 국가에 사액(賜額)을 청했고 2년 뒤인 명종 5년에 국가로부터 사액이 내려질 때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이 내려짐에 따라 서원의 이름이 소수서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왕명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는 칭호가 내려지게 되면 이는 곧 국가에서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사업을 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인 까닭에 면세되는 토지를 급여받게 되고 또한 공적인 기관에서 간행되는 서적이 배급됨과 동시에 병역이 면제되는 노비들이 주어지는 등의 많은 지원이 있게 된다.

백운동서원의 설립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 요소에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6세기 후반에서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약 200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전국 각지에 무려 400여 개의 서원이 설립되어 사학교육의 전성시대를 구가하였다. 이 가운데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사액서원만도 전체 숫자의 절반이 넘는 198개여서 조선조 후반기의 지방교육체제가 명실공히 서원 중심의 사학체제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산서원 전교당 이미지
도산서원 전교당

한편 서원의 지방별 분포를 보면 경기도에 40개소, 충청도에 57개소, 전라도에 66개소, 경상도에 156개소 등 이들 4개소에 모두 319개가 분포되어 있어 전국 총 378개 서원의 84%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경상도는 전체 서원의 절반 가까운 41.3%의 서원이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집중현상은 서원의 설립 주체인 사림(士林)들의 활동상황 및 지역적 연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당시의 사림은 크게 퇴계 이황을 태두로 하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정점으로 하는 기호학파가 두 갈래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영남학파의 세가 상대적으로 강했으며 이러한 상황이 서원의 영남 집중으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관학인 향교의 침체로 인하여 발생한 유교교육의 공백을 충실히 메꿔나가며 지방교육의 주축을 형성해 왔던 서원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의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앙정계에서 붕당정치가 진행되었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훈구파의 몰락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점차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서원 역시 이들 세력의 근거지로서 그 성격이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력확장 및 과시를 위하여 각자의 근거지가 되는 향촌에 불법적으로 사사로이 서원이 건립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조선조 후기에 이르면 이같이 중앙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설된 서원의 수가 600여 개를 넘어서게 되었다. 한 고을에 10여 개가 넘는 서원이 설립되는가 하면, 동일 인물이 10여 개의 서원에 동시에 배향되는 사례까지도 발생하였다.

이같은 서원의 남설은 궁극적으로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격을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인근의 백성들에게까지 많은 피해를 주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도 이같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수 차례 노력을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서원의 폐해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대원군(大院君)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전국에 있는 서원의 철폐를 명령하였다. 대원군의 이같은 강력한 정책에 따라 대부분의 서원이 문을 닫게 되었으며, 결국 순수한 서원은 27개소만이 남게 되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우리 나라의 학제가 근대적으로 변화하면서 성균관 및 향교와 더불어 서원 역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채 봉사(奉祀)기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 나타난 여러 가지의 폐단으로 인하여 국가에 의해 철폐되는 운명을 겪기는 하였지만 우리 나라 유교의 학문적 성과가 거의 대부분 서원을 통하여 이룩하였다는 점, 그리고 향교의 침체로 인한 지방교육의 부재를 충실히 보완하였던 점 등은 사립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 우리 유교의 부흥을 위해 크게 기여한 부분들이라 할 수 있다.

 

서원의 기능

서원의 주요기능은 기본적으로는 향교와 동일하게 교육기능과 교화기능이 있었다. 먼저 교육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 있어서의 교육의 목표는 성현을 본받고 관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유생들은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와 오경을 중심으로 공부하였다.

정치적 탄압으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목표는 초기의 서원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훈구파의 몰락에 이어 사림파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과거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결국 서원에서의 유교교육은 일차적으로는 이른바 도학(道學)으로서의 유교공부였으며, 다음으로는 과거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사장학적(詞章學的)인 내용도 교육의 대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병산서원 이미지
병산서원

특히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특징으로 많은 유교관련서적의 구비를 들 수 있다.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면 국가에서 공적으로 인쇄한 서적을 배부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던 이외에도 향교에 비해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서원에서는 독자적으로도 재정을 마련하여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각종의 유교관련 서적들을 구입 비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체적 연구를 통하여 나온 각종 저술들을 출판하였기 때문에 서원의 보유장서수는 대체적으로 향교에 비하여 우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서의 개별적 구입이 어려웠던 향촌사회에서 서원은 지방 유림들에게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도서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인 교화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및 송대의 6현 그리고 우리 나라 18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황과 송시열(宋時烈), 이이 등의 인물을 배향한 서원이 가장 많았으나 배향인물의 선택 폭에 있어서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초기에는 하나의 서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한 분을 선정하여 제사를 모셔왔으며, 그 이후에 또 다른 인물이 배출되면 제사 대상에 추가하곤 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며 서원의 질서가 문란해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 제사대상 인물에 대한 선정이 뚜렷한 기준도 없이 이루어지거나 심지어는 세력과시를 위한 목적으로 한 서원에서 수많은 인물을 동시에 제사지내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화천서원의 향사 이미지
화천서원의 향사

한편 국립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던 것이다.

제사 이외에 서원이 지니고 있었던 교화기능으로는 지방 풍속의 규찰(糾察)기능을 들 수 있다. 이같은 기능은 향교에도 있어왔지만 그 성격이나 내용으로 볼 때 서원의 규찰기능이 보다 실질적이고 강력한 형태로 나타났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로 설치된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강상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자를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하였다. 즉, 각 고을에 설치된 국가의 관부(官府)가 주로 형사(刑事)문제를 처리하였다면 서원에서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평가하고 처리해 나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후기에 들어서게 되면 경우에 따라 무고한 백성에 대한 탄압수단으로 악용되는 폐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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