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위패봉안 인물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인물은 유교를 창시하고 발전시킨 성인 및 현인들로 인류의 문화 발전을 위하여 도의를 선양한 위대한 인물들이다.
역사적으로 공자 이외의 인물도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공자 외에 공자의 제자인 안자와 증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 전국 시대의 인물인 맹자를 5성(聖)이라 하여 성인으로 모시고 위패를 안치하고 있으며 그 옆의 동향위, 서향위에는 송나라의 학자 4현 신라의 학자 2현(설총, 최치원) 고려의 학자 2현(안향, 정몽주) 조선의 학자 14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등을 합쳐 도합 5성위와 송대의 4현, 우리나라의 학자 18현 등 27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5성(五聖)
유교의 총본산인 성균관이나 지방유교의 본산인 각 향교의 대성전에는 유교의 많은 성현들이 배향 되어 있다. 양천향교 대성전에는 중앙에 이른바 오성위(五聖位, 유교의 다섯 성인의 위패)라고 하는 위패가 중앙 정면에는 공자님의 위패가 있고, 그 다음 줄 동쪽 배위에는 복성공(復聖公) 안자(顏子), 술성공(述聖公) 자사(子思), 서쪽 배위에는 종성공(宗聖公) 증자(曾子), 아성공(亞聖公) 맹자(孟子)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공자(孔子)
천하무도의 혼란을 딛고 2,500년 남짓한 오랜 기간동안 인류에게 문명의 빛이 되어준 유교를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내어 찬연히 밝혀준 인물이 바로 공자님이다.
공자님께서는 기원전 552년 노나라의 추(鄒)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친 안씨(顔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노나라를 지키던 훌륭한 장수였고 청빈하고 강직한 성품의 송나라 귀족의 후예였다. 부친 숙량홀은 키가 10척이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전쟁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두 군데 남아있다. 공자님도 용모나 몸집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고 한다. 사기(史記)에는 “키가 9척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거인이라고 부르며 신비스럽게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공자님께서 정(鄭)나라에 가셔서 제자들과 떨어져 어려운 처지에 처해있을 때의 모습을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어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고요같고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공자님의 가계(家系)는 훌륭했으나 경제적으로 가난하였다. 공자님께서 태어났을 당시는 물론 공자님께서 3세가 되시던 해 아버님마저 돌아가신 뒤로 더욱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가정 형편 속에서도 어렸을 때 제기(祭器)를 펼쳐놓고 예(禮)를 갖추는 놀이를 하신 것으로 미루어 젊은 홀어머니에게 바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5세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에 뜻을 두고 배움에 몰두하였다.
공자님에게는 뚜렷하게 정해진 스승이 없었다. 다만 생활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사가 그의 스승이었으며 학문의 대상이었다. 공자님께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항상 걱정했으며 그들을 위한 배움의 체계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한 지방을 맡아 훌륭한 정치를 베풀어 많은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기도 하였고, 노나라의 법무부 장관 직책을 맡았을때는 그의 올바른 판관과 확고한 신념으로 노나라의 정치를 빠르게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웃나라인 제나라가 이것을 시기하여 간교한 계략을 꾸며 노나라 왕의 판단을 어지럽게 했으며, 노나라왕이 혼한에 빠져 백성들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하자 미련없이 벼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야인의 생활로 돌아온 공자님께서는 이제 단지 노나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과 혼돈 속에 싸여있는 천하의 백성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세상을 바로 잡고자 커다란 뜻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공자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갖은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고 많은 나라의 정치가들과 왕들에게 올바른 정치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라고 설득하였다. 순방 중에 진나라로 가는 도중 광(匡)이라고 하는 곳에서 다른 사람으로 오인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고 촌라로 가는 도중에는 괴수에게 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많은 위험을 겪으며 이루어진 공자님의 희생적인 노력은 불행히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는 하였지만 그릇된 욕심에 사로잡혀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한계를 느낀 공자님은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가서 후세에게 유교의 진수를 전파하여 줄 제자들을 키웠으며, 전해 내려오던 많은 성현들의 저술을 모아 집대성하고 이를 가다듬어 훗날 유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학문이 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안자(顔子, B.C. 521 – B.C. 491)
공자의 수제자로 춘추 말엽 노(魯)나라 사람이다. 성은 안(顔)이고 이름은 회(回)이며 자가 자연(子淵)이기 때문에 안연(顏淵)으로도 일컬어진다. 노 소공(昭公) 21년에 출생하여 애공(哀公) 4년 3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안회는 공문제자 중에서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고, 사람됨이 총혜(聰慧)롭고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내향적인 성격으로 침정(沈靜)한 데다가 엄격하고도 근면하였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행수양(德行修養)면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덕행면에서 안연을 제일로 지목하고 그의 인(仁)을 높이 평가했다.
안회의 생활태도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인’을 하루에 한번 실천하기도 어려운데 안회는 인을 삼개월 동안이나 실천, 행동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신 바 있다.
안회는 스승인 공자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줄곧 따랐으며 공자의 말에 맹종하여 일언반구의 어김도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사(早死)하여 공자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동한(東漢) 명제(明帝) 15년(72)부터 ‘72제자’에게 제사했는데 안회의 신위를 모든 제자 중 수위(首位)에 놓았으며, 공자에게 시제(時祭)를 올릴 때도 유독 안회만은 배향하였다고 한다. 명 세종 가정 9년(1530)에 복성안자(復聖顏子)로 개칭되었다.
증자(曾子, B.C. 506 – 436)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이다. 성은 증(曾)이고 이름은 삼(參)이며 자는 자여(子輿)이다. 추존하여 증자(曾子)라고 하였으며 공자보다 46세가 적다. 집안은 몰락한 귀족으로 빈한하였으며, 그의 부친 증점(曾點)도 공자에게서 수학하였다.
자사(子思, B.C. 483 – 402)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가학파의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성은 공(孔) 이름은 급(伋) 자는 자사(子思)로 공자의 적손이다.
맹자(孟子, B.C. 371 – 289)
전국시대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로 유가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성은 맹(孟), 이름이 가(軻)이며, 자는 자거(子車) 또는 자여(子輿)로 노나라 추읍(鄒邑) 사람이다. 아버지는 맹손격(孟孫激)이고 어머니는 장씨라고 하나 선계가 분명치 않다.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
본래의 이름은 돈실(敦實)인데 영종의 구휘(舊諱)를 피하여 돈이로 고쳤다고 한다. 자는 무숙(茂叔)이다. 세칭 염계선생이라고 불렀다.
정 호(程顥, 1032 – 1085)
송 명리학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淳)인데 세칭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고 하였으며, 하남(河南) 낙양(洛陽)사람으로 송 인종 명도(明道) 원년(1032)에 출생하여 송 신종 원풍 8년(1085)에 졸하였다.
정 이(程頤, 1033 – 1107)
자는 정숙(正叔)인데 세칭 ‘이천선생(伊川先生)’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민하였고, 18세 때는 천자에게 상서하여 세속의 의견을 물리치고 왕도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등을 지냈고, 철종(哲宗) 때 간당(姦黨)으로 몰려 삭적(削籍)되고 부주(州)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주 희(朱熹, 1130 – 1200)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이며 이름은 희(熹)다.
설총(薛聰, 650년경 ~ 740년경)
신라 경덕왕(742~765) 때의 사람으로 자는 총지(聰智)이다. 설총의 부친은 원효대사이며, 모친은 요석공주이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고려 현종(顯宗) 13년(1022)에 홍유후의 시호를 받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최치원(崔致遠, 857 ~ ?)
자는 고운(孤雲) 호는 해운(海雲), 신라 사량부 사람이다. 고려 현종 11년(1020)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다음 해에 문창후로 증시(贈諡)되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문창후는 많은 저술을 하였으나 『동문선(同文選)』에 실린 글과 『계원필경(桂苑筆耕)』 『사산비명(四山碑銘)』등의 약간의 글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안유(安裕, 1243 ~ 1306)
초명은 유(裕)이었으나 나중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 문종(文宗)의 이름과 같았기에 기휘(忌諱)하여 유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자는 사온(士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으로 남송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뜬 것이다. 고려 순흥 사람이다. 고려 충숙왕 6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연일(延日), 초명은 몽란(夢蘭)이었으나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뒤에 다시 몽주(夢周)로 개명하였다. 고려 연일 사람으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태종 원년 신사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충이라 하였고 중종 12년에 문묘에 종사하였다. 숭양서원(崇陽書院)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영모재, 임고서원 등에 그의 초상이 봉안되었다.
김굉필(金宏弼, 1454 ~ 1504)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며,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무오사화(1498)때는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 하여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그 후 감자사화(1504) 때는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선조 원년(1598)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동왕 7년(1574)에 문경이라 증시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 ~ 1504)
자는 백욱, 호는 일두이며, 본관은 하동이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혼자 독서하다가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수학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 ~ 1519)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整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개국공신 온(溫)의 5세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본관은 여주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게 되었다. 선조 즉위년(1567)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사호를 문원(文元)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어있다.
이황(李滉, 1501 ~ 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이며 본관은 진보이다. 68세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후일 영남학파를 형성함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선조 3년(1570) 영의정에 추증하고 동왕 9년(1576)에 문순이라 증시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이고, 본관은 울산이며, 대대로 호남의 장성에서 살았다. 부친은 참봉 김령이며, 모친은 옥천 조씨이다. 정조 20년(1796)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하서집(荷棲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등이 있다.
이이(李珥, 1536 ~ 1584)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친은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며, 모친은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인조 원년 계해년(162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숙종 7년(1681)에 성혼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동왕 15년(1689) 일시 출향 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 때에 다시 종사되었다.
성 혼(成渾, 1535 ~ 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묵암(默庵), 본관은 창년이다. 사후에도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에 연루되어 관직이 추탈되기까지 하였다. 인조 11년(1633)에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文簡)이라 시호하였다. 숙종 7년(1681)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 ~ 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선조 11년(157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었으며, 동왕 14년 부친인 김계휘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장생은 여러 차례 벼슬을 받기는 하였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또 나아가도 오래지 않아 사직하여 낙향하곤 하였다.
조 헌(趙憲, 1544 ~ 1592)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후율(後栗), 문열(文烈),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집이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하였고, 여러서부터 매우 효성스러웠다. 그의 학문은 실천궁행으로 주장을 삼고 거경(居敬)에 힘써서 근독공부(謹獨工夫)를 꾸준히 하였다. 또한 천문지리 등에 능통하였으며 경세의 대지가 있었다.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 집(金集, 1574 ~ 1656)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부친은 문묘에 배향된 김장생이며, 모친은 창녕 조씨이다. 고종 20년(188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와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후에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김집에게 배웠다. 인조11년(1633)에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하였고, 이로 인해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조 32년(1756)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송준길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대로사(大老祠),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 매곡서원(梅谷書院), 초강서원(草江書院) 등 전국의 수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송준길(宋浚吉, 1606 ~ 1672)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이다. 어려서부터 이이를 사숙하였고, 20세 때에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인조 2년(1624) 진사가 된 뒤 학생으로 천거되었고 동왕 8년 세마(洗馬)에 제수된 후, 동몽교관, 예안현감, 형조좌랑, 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 7년(1681)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조 32년(175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숭현서원, 충현서원, 봉암서원, 돈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語錄解)』와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오관서원, 자운서원, 반계서원, 비봉서원, 구봉서원, 문회서원 등에 제향 되었으며, 숙종 24년(1698)에 문순(文純)이라 증시하였고, 영조 40년(1764)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로는 『남계집(南溪輯)』, 『가례요해(家禮要解)』, 『성현유범(聖賢遺範)』 등 수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하였다.